책 소개

출판사 리뷰

성경에는 시학의 수사법이 가득하다
저자는 성경읽기의 한 방편으로 시학적인 독서법을 주문하면서 성경에는 시학에서 주로 쓰이는 수사법이 가득하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성경이 감춰둔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수사적 표현의 가장 비근한 예로 ‘빵’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성경 원서에 있는 빵을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떡이라고 번역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유법’이라는 수사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임을 밝힌다.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영어원문을 보면 양식이 일용할 빵(daily bread)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빵은 양식 전체, 더 확장해서 의식주의 모든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제유적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빵처럼 식탁 위에 매일 오르는 음식물을 어쩌다가 명절 같은 잔칫날에나 먹는 떡으로 옮긴다면 제유적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오류는 단어 하나의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성경의 수사 구조 전체가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제유법이라는 수사학적 대칭물로 쓰인 빵을 통해서 성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수사학의 세계의 세밀한 구조와 상징 코드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사학은 고유한 문화의 산물이다. 세계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가 만들어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수사학이 탄생한다. 성경 역시, 문화적 맥락이 만들어낸 수사학의 보고인 셈인데,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전체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와 그 역사가 지니고 있는 상징 코드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성경이 구사하고 있는 수사학에 유의하면서 철저하게 문학 텍스트와 같은 독서를 제안하고 있다. 그럴 경우 성경의 행간이 숨겨두고 있는 풍요로운 시학의 성찬이 열린다는 것이다.

빵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함의와 성경의 아이콘들
책의 표제를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고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문화적 상징성을 설명하기 위해 ‘빵’이 가지고 있는 의미 분석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빵을 떡으로 번역할 경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사학적 오류를 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는 빵과 포도주는 어울리는 조합인데, 떡과 포도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빵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익숙한 떡과 막걸리로 번역한다면 최후의 만찬의 장면에서 성체의 비유 코드와 상징은 없어지고 말 거라는 것이다. 막걸리는 적색이 아니기 때문에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피의 상징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사학적 독법과 함께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것으로 저자는 문화와 생활양식에 대한 이해를 꼽는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전날에 열렸는데 유월절에는 희생양을 바치는 유대인의 풍습을 알지 못하고서는 최후의 만찬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월절을 추석이나 단오로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빵에 이어 눈물, 새와 꽃, 아버지, 탕자, 양, 집, 목수, 접속, 낙타, 포도, 제비, 비둘기, 까마귀, 독수리, 지팡이, 사막과 광야, 예수, 십자가 등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들을 프리즘 삼아서, 성경 읽기와 해석의 새로운 각도를 제공한다. 저자는 예수님은 같은 주제에 대해 세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세 가지 비유를 나타내는 ‘세 우화(three parables)\'는 성경만의 독자적 형식이 아니라 수사학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이야기 형식임을 지적한다. 한 가지 이야기를 다른 두 이야기와 연관 지어 의미 있는 구조물,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탕자’라는 성경의 개념을 설명한다. 탕자 이야기 역시 세 가지 병렬법(parallelism)을 통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는 비유는 유목 문화를 경험하지 않은 문화권의 사람들은 제대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여자가 하나의 은전을 찾아 등불을 켜고 입을 뒤지면서 찾는 성경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이는 비록 유목 문화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화폐를 쓰며 살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제의 비유를 통해, 오랫동안 부모 곁을 지키며 효도를 한 형보다 멀리에서 돌아온 동생을 귀하게 대접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결국 탕자의 의미를 거의 완전한 형식으로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성경의 독자는 양, 잃어버린 은전,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동생. 이 모두가 아직 신을 영접하지 못한 탕자의 퍼소나라는 것을 이해한다.
또 다른 아이콘 낙타를 설명하면서도 저자는 해박한 문화적 배경 지식과 기호학적 감수성을 통해 색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저자는 널리 알려져 있는 성경구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더 쉬우니라”를 인용하면서, 낙타의 히브리어 표기는 ‘gamla’이고 밧줄은 ‘gamta’인데 이 두 말의 발음이나 스펠이 비슷해서 밧줄을 낙타로 잘못 번역한 것이라는 설을 소개한다. 그러니까 원뜻은 밧줄을 바늘구멍에 넣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낙타는 ‘크다’의 상징처럼 쓰였음을 밝히고, 따라서 큰 것이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원래의 뜻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성경의 비유는 이처럼 풍부한 비유를 거느리면서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낙타는 등에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데, 그 짐은 낙타 자신의 짐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짐임을 적시하고, 따라서 낙타의 비유가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 욕심껏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한 어떤 경고의 비유라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